[Macho’Story] (19) 하얀 목련이 휘날리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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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마이스=Macho 칼럼니스트) 세상에 공짜는 없고 낙하산은 그냥 하루아침에 타는 게 아니었다. 하여튼 난생처음 땅 위에서 수백 미터 상공을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소원은 결국 이뤘다. 그리고, 해군 특수부대에서 수중침투훈련 B-6도 받았다.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종일 물속에 있으면 몸이 덜덜 떨리다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구타와 얼차려로 온기를 찾아주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었다. 물속으로 막 밀어 넣으니 숨이 막혀 혼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름이면 동해안 바닷가에서 훈련하며 신선한 해산물을 질리도록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군장을 메고 밤새 산등성이를 뛰다 보면 멀리 속초 먼바다에 떠 있던 수많은 오징어 배 불빛들과 저 아래 불빛이 환한 콘도에서 밤공기를 타는 음악과 남녀의 술에 젖은 웃음과 노랫소리는 동연배의 우리와 극과 극으로 낯설었다. …

우리는 훈련만 받았고 취사와 경계, 행정, 기타 업무 등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기간병들이 했다. 종종 손님들이 찾아온다. 사복 입은 국방부 장관이나 미군 장교 등에게 인민군 복장의 부대장이 거수경례하는 어색한 광경이 생긴다. 우리는 특수살상무술, 동물 생식, 침투훈련 등 시범을 보이면 손님들은 소나 돼지 등 위문품을 주고 간다. 열매와 더덕이나 산삼 등 온갖 약초로 담근 소주를 훈련장 땅에 파묻고 몇 달 후 꺼내 마시는 호사도 누렸다.

3년 만에 제대하며 군번과 계급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낯설어 술만 마시면 익숙한 근교 산으로 뛰어갔다. 서울은 여러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산꼭대기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꼭 설악산에서 봤던 속초 앞바다 오징어 배 불빛과 같아 편안해졌다. 군 담력훈련처럼 한밤 중에 아무도 없는 산을 내달리고 이름 없는 무연고 무덤가에서 술을 마셨다.

잠시 지방 소도시 무술 도장에서 사범을 했다. 좁은 도시에서 껄렁대던 지방 토박이들은 외지인을 잘도 구별해 술집에서 시비가 곧잘 붙었다. 내가 몇 대 때리면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다시는 시비가 없었다. 해가 떨어지고 술만 취하면 공동묘지가 있는 근처 산으로 내달려 무덤을 베고 누워 소주를 마시며 큰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나한테 맞은 또래 토박이들과 선후배들 모두 친구가 됐고 내가 밤마다 공동묘지에서 노래 부르며 술 마신다는 소문이 동네 다방아가씨들 귀까지 갈 때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얼마 후 외국으로 갔다. 한동안은 무술에만 전념하며 현지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밤에 술만 취하면 산을 찾아 혼자 도심 공원을 뛰어다녔고 친구들에게는 ‘술 깨려고’란 핑계를 댔다. 분명히 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은 거 같은데 새벽에 깨보면 내가 공동묘지에 누워있었다. 자주 주먹을 휘둘렀다. 군대 기억이 싫어 잊고 싶은데 술에 취하면 나도 모르게 군가를 불러댔다.

술에 취하면 변해버리는 자신이 두려워 진열장에 모아 놓은 술을 친구들에게 나눠 주거나 변기에 버렸고 한동안 술도 끊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 후 내가 계속 떠오르는 군대 기억 등이 만든 트라우마 같다며 치료하라고 기도해 주신다. 자꾸 술만 취하면 산이나 공동묘지로 달려가게 만든 기억이 싫어 한국을 잊고 살았다. 현지 적응에만 집중하자 꿈도 영어로 꿨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영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가족 이외엔 우리말을 쓸 기회도 없었고 김치 등 한국 음식도 먹지 않았다.

강산이 변할 때쯤 한국에 돌아와 내가 뒹굴던 설악산을 찾았다. 이상한 군복 사내들이 나타나 민간인 출입금지라며 나가라기에 ‘내가 니들 선배다.’ 했다. 밀봉 교육을 받던 안가를 가니 때 마침 지던 석양은 전에 내 군복에 물들던 것과 똑같았다. 표창 연습용 표적, 철봉, 개집 등이 남아있으나 수년 전에 폐쇄된 건물은 폐가가 되어 마치 한번 쓰고 버린 공작원 같았다.

옛 기억을 더듬어 혹시나 하고 파보니 약초를 담근 소주병이 손에 잡힌다. 아! 마치 시간이 멈췄듯 10여 년 전 군복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내 모습이 지는 해에 실루엣처럼 투영된다.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낙하산 타는 환상을 좆아 입대한 소년의 감정을 황폐하게 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분함에 혼자서 그렇게 목놓고 엉엉 큰소리로 밤새 울부짖었다.

분단 이후부터 비공개리에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약 1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실제 공작에 투입됐고, 절반이 넘는 7,726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10년간의 베트남전 한국군 전사자 5,000여 명보다 많은 숫자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북파 형식의 대북 특수임무 수행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지만 요원 양성과 응징보복, 접보수집 등 비공식 특수공작은 2000년대까지 계속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정부 당시 민주당 김성호 의원의 노력으로 관련 법률이 개정됐다. 이듬해 국방부는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양성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2004년 ‘특수임무수 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1948년 8월 15일 이후 2002년 12월 31일까지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특정해 보상이 추진됐으나 아직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보상 당사자들의 수가 적지 않다.

한국전쟁 막바지 많은 공작원이 북한지역에 침투해 공작 중이었다. 휴전이 임박해지는 소식이 들리자 빨리 남쪽으로 귀환시켜달라는 그들의 무전이 남쪽으로 빗발쳤다. 그러나, 본부는 그들의 피맺힌 호소를 무시하고 무전기를 꺼버렸다. 그 후 그들 대다수는 죽거나 실종됐고 일부는 북한에 투항해 남파간첩양성소에서 선생으로 일하며 배신당한 조국을 향한 복수에 대신하기도 했다.

월북을 기도하다 지뢰 폭발로 사망했다던 선임이 사실은 ‘북측지역에서 용변을 보기 위해 매복지역을 이탈했다가 인근 지뢰를 밟고 사망하였으므로 전투 또는 이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사망한 자에 해당한다.’는 군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이 2008년 있었다. 30여 년 만에 밝혀진 진실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술에 취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산새인 것이 설악의 영혼이여. 왕벌과 딱벌이 날아가니 하늘에선 번개가 치고 박쥐는 숨어든다. 우리는 금석 같은 충성심으로 점을 찾아 선을 이어 통일 성업을 완수한다’라고 중얼거리며 밤중에 산을 뛰어다니거나 무덤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군대의 지워지지 않은 문신처럼 나는 지금도 아침 5시에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종종 10~20km 정도는 그냥 걷거나 뛰고 오대산 등 험산도 배낭을 지고 맨발로 등산한다.

항상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고 그만큼 남으로부터 피해받는 것도 싫다. 그래서,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공공사회의 기본 질서를 망치는 것들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월드컵이 한참일 때 한 모임에서 탈북자를 만났다. 술자리 대화에서 그의 고향이 아는 지역이라 내가 몇 마디 보탰다. 조금 후 그가 조용히 다가와 ‘언제 탈북했는데 남한말을 그렇게 잘하냐’고 한다.

우리 집 마당에는 하얀 목련 나무가 있어 해마다 봄이 되면 목련향이 집안과 이 층 내방까지 가득 찬다. 목련은 큰 꽃망울이 달려있다가 언제 폈나 싶으면 벌써 꽃잎이 떨어질 정도로 빨리 진다. 하얀 잎은 연약해 떨어지거나 만지면 곧 진갈색으로 변한다. 어릴 적부터 봄이면 목련 꽃잎이 난간과 마당 그리고 담장 주변으로 하얗게 내려앉았다.

입대하는 날 아침, 집을 나와 좀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목련 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그 이후 하얀 목련만 보면 군대 기억이 절로 떠오른다. 아마도 이 문신 같은 잔상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 같다.

*훈련이나 공작 중 생을 마감한 선후배 북파공작원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사진: Macho/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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