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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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마이스=지봉선생 칼럼) 내가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보통크기의 우리 한글도 읽지 못하는 까닭에 잘못 본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9월에 나온 통계로는 나라 안에 대학교를 나온 이른바 지성인(知性人)으로 분류될 실업자(失業者) 수가 500,000 명을 넘었다고 한다.

지나간 날이기는 하지만, 1954년 초여름, 대학의 이른 여름방학이 7월초에 시작되었을 때, 당시에는 서울에서 강화도를 가자면 김포군과 강화도 사이의 그 좁고 물살이 쌘 나루를 배로 건너기 전과 후 두 번에 걸쳐 여행허가증(경찰서장 발행)을 검사했는데, 그 검사는 경찰관과 헌병의 합동 검문을 받아야만 했기에, 나는 5년이나 대학 입학년도로 보아서는 선배이신 형과 고려사에 나오는 고려 팔만대장경(高麗八萬大藏經)의 판각이 이뤄졌던 고장을 가 보고싶어, 우선 대학 학장실에 강화고적및 팔만대장경 판각지의 현지조사 승인신청서를 만들어 제시했다.

당시의 문리대(文理大) 당국은, 우리 두 학생의 요청이 학생으로서는 6.25 전쟁이후 최초라면서 당시에는 드물던 한자겸용(漢字兼用) 타자기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라 인쇄된 공용지에
허가서 뿐 아니라, 여행과 관련되는 기관장들에게 편의제공을 의뢰한다는 문구까지 넣어 벌겋게 관인(官印), 직인(職印), 계인(契印)을 찍어 허가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 허가서면, 경찰서에 가서 별도의 여행허가서를 또 받아야 할 사유가 없어졌기에, 복잡한 나루에 가서 긴 줄에 서있다가 허가증을 검사하는 경찰에게 대학장의 허가서를 내 보이자, 그는 초소로 들어가더니 초소 책임자인듯한 경위계급장을 단 분을 모시고 나와 무조건 우리 둘을 방금 들어온 배의 선장에게 인도하면서 ‘잘 다녀오시라’면서 경례를 부치는 것이었다.

10분 뒤, 건너간 나루에서 다시 그 허가서를 본 경찰관도 거수경례를 하고는 경찰의 백차에 우리 둘을 태우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겠다는 군청까지 모시라고 운전하는 경찰관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1954년 7월초의 일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가 가진 학생증은 이른바 “전시학생증”으로 발행인이 대학총장이 아니라 문교부장관이었고 빨강색의 빗금 두 개가 쳐있는 학생증이었다.

왜(?) 이런 옛 얘기를 꺼내는가하면 당시에는 대학생이 가뭄에 콩나듯 했고, 대학생이면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인정되는 국민의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학생의 행동거지(行動擧止)는 억지로라도 타인의 모범(模範)이어야만 했었다. 사회적인 의식과 분위기에 위압된 행위라고는 해도 대학생은 타인들이 ‘대학생 다운데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도록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상황은 매우 중차대(重且大)한 교육훈련이다. 사람의 틀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경찰의 호의로 군청에 도착한 우리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문화과를 찾아 처음에는 계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학장 발행의 허가서를 보이고는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강화군내의 유적과 위치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계장님은 우리 요구를 듣고는 대답도 없이 저쪽에 따로 앉아계시는 과장님께 가더니 조금 있다가 과장님과 함께 오셔서는, 우선 군수님께 인사를 드리자면서 우리를 데리고 군수님실로 들어갔다.

군수님께서는 “이렇게 고마울데가 없다시면서, 조사가 끝나고 학교에 보고서를 쓰시거든 우편으로라도 그 보고서 사본을 군에 보내 달라시면서 지금 현재로는 군이 가진 군 내의 문화재나 역사관련 기록들이 전쟁으로 모두 불타고 사라져, 군으로서는 가진것이 없다면서 다시 조사보존해야할 의무는 알지만 인력도 학구적인 연구도 군으로서는 할 입장이 못된다며 한탄을 하시는 것이었다, 끝에 말씀하신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돈대들과 사찰들 뿐이라셨고, 조사를 하시려면 시골로 가셔야 되는데, 치안이 아직은 확보된 상황도 아니며 북한과의 거리가 바다이기는해도 2 킬로미터인 곳도 있어서 조사하시는 일도 위험이 따를 것 같으니, 경찰서에 의뢰하여 경찰이 호위를 하도록 해 드리겠다면서, 과장에게 옆 경찰서로 모시라면서 전화기를 들어 경찰서장님과 통화를 하시는 것이었다.

강화 토착민이신 과장님의 설명으로 안 것은,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지금은 농토라는 것이었고 절이 있었다는 기왓장 한 장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과장님의 그 말에 군수님도 “이거 내가 할 일이 그거였구나. 예산도 없고, 그런데 서과장 그 절 위치는 아시오? 주줏돌 한 개라도 남아 있는 건 없오?” 여서 우리가 되려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애 타 하시는 것이었다.(아시다싶이 그 당시의 군수란 행정고시를 패스한 관료로 대졸이셨고 임명제였다.)

당시 강화섬의 실정뿐 아니라 전국 어디나 문화제의 보존이나 역사현장의 유지보수란 꿈조차 꾸지 못하던 국민소득(GNP) $50 이던 때였다.
정말이지 남아있는 문화재란 스님들의 살림집인 절간들 몇이 님아있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조시대의 강화도령 철종의 유택은 마치 비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각 하나 크기의 기와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고려의 냄새가 짙어야 할 고려산 인근조차 고려궁도 사라졌고 고려고종릉 마저도 여염집 무덤같을 뿐이었다.

섬 전체를 삥 둘러싼 돈대들과 진,보들은 허물어질 만큼은 허물어져 보수 유지 작업은 커녕 가까운 동민들이 잘 깎아 만든 돌들을 집을 지을 때 쓰이는 초석 용도로 가져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판이었다.
나흘을 꼬박 돌아보는 기간중에 경관 한사람이 총을 어깨에 매고 우리를 따라 다녔지만, 정작 그가 한 일은 우리가 배고파 먹는 식사를 가는 곳마다의 시골식당에서 경찰이 나중에 준다하고는 우리를 밀어내는 역할 뿐이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두 밤은 절에서 잤으니 무료이고 두 밤은 여인숙 같은 여관이었는데 숙박료는 군청이 낸다고 했다.

그런대도 우리가 얻은 소득은 고려산의 서북쪽에 있는 두 절 (청련사와 백련사) 가운데 백련사는 그 위치가 서북향으로 신라.백제의 사찰 형태가 아닌 티벳불교 사찰양식으로 지어진 특이한 형태의 사찰 발견이었다.
내 지식이 모라는 것이겠지만 사찰의 형태가 티벳불교사찰 형태를 고스란히 닮은 절은 강화 고려산 서북 산정에서 50미터 정도 아래 높이에 아늑한 곳을 깎아 무지무지하게 큰 돌들을 쌓아 넓은 마당을 조성하고 10미터가 넘는 축대위에 세운 정사각형 건물의 티뱃형 사찰이 강화도에 있다는 것이다. 강화에 티벳불교 연구 대상인데 아직 그 누구도 한국 불교에서 이를 연구한 이가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2학기가 개학하기 전에 조사보고서는 내가 쓰고 6.25 전쟁때문에 복학생이었던 5년 선배의 공군대위 통역장교였던 그 형은 감수를 한 다음 교정을 거쳐 완성된 보고서를 학장실에 제출했더니, 학장실에서는 우리의 보고서를 공판타자(孔版打字)로 인쇄를 하여 각 교수실들에도 배포했던 모양이었고, 우리는 3부를 더 받아 강화군청 군수님 앞과 경찰서장 앞 그리고 문화과장 앞으로 우송했는데 우송비는 대학본부에서 내 주셨다. 그렇게 약속은 지켰다.

뒷 얘기 하나가 나온다. 당시 이선근 박사님은 정치학과 과장이셨는데 우리 보고서를 시간이 나셨던지 읽으신 모양이어서 내가 대학 3학년에 올랐을 때, 문교부장관으로 가신 그 이선근 박사께서는 첫 지시가 강화 선원면의 선원사 유적지를 정부가 3만평을 구매하여 복원은 할수 없더라도 유허(遺墟)만은 축성토록 조치를 하신것이었다. 물론 그 어른께서는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고 승인을 얻어 정부의 자금으로 그 땅을 사신것이었다.(지금 그곳을 가보면 그 앞에 절이 하나 세워져 있고 선원사 유허지는 토지정리만 되어 있으나 세운 석판에는 이선근 문교부 장관이 조성했다는 글이 쓰여 있다.(요즈음 거기가 유명해진 것은 소가 혀를 때리는 소리가 마치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같아 절에서 기르고 있는 것이다.)

폐일언 하고, 우리나라가 부존자원이 따로 없기에 오로지 인재(人材)만이 가장 큰 자원이어서, 교육은 이 세계 어느나라 보다 귀중한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연유로 다른 나라보다 대학이 많아야 하고 대학을 졸업한 고도의 지식을 흡수한 인원의 활약이 무엇보다 긴요(緊要)로운 것이 사실이다. 양적확대(量的擴大)에 발맞추어 인재의 질적고능력화(質的高能力化)가 따르지 못한다면, 학력의 인플레이션을 맞아 고등학교출신의 일에 대한 전문기능화(專門機能化) 확보보다 국가적 손실(損失)이 더 커질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대졸 실업자가 500,000 명을 초과한다는 것은 대학의 양적확대가 질적고능력화와 서로 맞지 않게 됐다는 의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량과 질의 차이를 하루라도 빠르게 극복(克服)해 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앞날은 암흑(暗黑) 이 지배하는 사회로 귀속(歸屬)되고 말 우려가 있다.

대학생은 대학생 답게 스스로를 끌어 올려야 하고, 사회는 대학생과 그 졸업자들에게 응분(應分)의 대우를 하여먀만 한다.

대학생 50만을 줄이든지, 50만을 가용자원(可用資源)으로 긴급히 재교육 하던지 둘 중 한 가지를 우리 정부는 선책할 때가 됐다.

우리의 주안점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기술의 앞섬이고 또 하나는 무역의 귀재양성(鬼材養成)이다. 따라서 대학을 졸업한자가 세계공통어인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 그들은 기술과 연구직으로 돌려 그 눙력에도 미달이면 대학 졸업장은 국가가 회수하여야 하며 고졸대우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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