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마이스=박철민 칼럼니스트) 저녁 어스름 별 할 일 없이 서성인 산책길, 초등학교 교정을 돌아나가 야트막한 언덕 위 공원 길 어느 한 구석에 숨겨져 있는 묘비명 없는 봉분을 살피다가 무덤의 풀을 베고 누워 있는 도사견을 발견한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힘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 전혀 짖을 생각도 하지 않는 도사견. 성대 결절을 앓고 있나?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 속의 사인(死人)이 혹 저 개의 주인이어서 혹시나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기다리다 지쳤나?

다가가려는 순간 인기척에 놀라 피로와 지친 노구를 간신히 일으켜 비척 달아난다. 견성(犬性:개의 오래된 삶의 습성) 나는 힐끗 힐끗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쉬운 듯 더듬거리며 달아나는 녀석의 모습을 그냥 바라본다. 그러다 새삼 저 개와 나 사이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막연한 거리감과, 손에 닿은 듯하다 때로 너무나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고 마는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하여 망연히 자문한다. 나는 언제 관계에 대하여 고마워한 적이 있었던가? 쓸쓸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이내, 어둠이 몰고 오는 차가운 바람의 무게를 피부로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산책길에는 먼 언덕 높은 곳에 웅크리고 앉은 채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개의 눈빛이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마다에 늙은 도서견의 눈길을 느끼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온다. 우리들의 삶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그 모든 관계들의 언저리에 찬연히 피어오를 상현(上絃)! 봉분 위 도사견의 슬픈 눈빛은 그대로 내 지나온 삶의 궤적이었고 절망이기도 했다.

‘앞을 보고 나가기만 하는 사람에게 주위라는 단어라든가, 뒤를 본다. 같은 수사는 지극히 사치’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진군하는 길에 놓인 거대한 장벽을 마주해 본 사람은 안다. 마치 대 프랑스 왕조를 경영하다 엘바라는 작은 공국의 영주로 강등(나폴레옹은 유배된 것이 아니다. 나중에 탈출하여 재집권한다)된 나폴레용이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느낄 테니까. 뇌의 몰락을 부르는 지독한 동맥경화처럼 막혀 있는 대뇌혈관일지라도 뚫릴 가능성은 있다.

루이 14세의 부인 마리테레즈가 한 말인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혐오성 발언이, 프랑스 국고가 아닌 왕실재정의 6/1 정도만 쓰고도 향락과 사치의 대명사가 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와네트(그에 비하면 명성황후의 사치는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에게 전이된 배경에 국민들의 앙금이 있었다면, 그 앙금의 상처도 사실은 그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산책이라는 명목으로 봉분을 지키는(?) 늙은 도사견의 자리를 갈취한 나의 파렴치는 용서 대상이 아니다.

긍정의 사고니 부정의 사고니 하는 단어는 몽환을 부른다. 마치 마리화나처럼 젖어드는 성공이라는 생의 사슬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전 생애를 휘감는 담쟁이 넝쿨이 되듯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새로울 것이라는 환각이 주는 믿음만이 오늘의 나를 기르고 미연하게나마 희망을 부채질하고 미련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살아왔고 또 살아가며 인생이라는 이름의 협궤열차를 갈아타다가 명멸할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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