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내용이 형식을 결정합니다. 좀 그럴듯한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양식이란 반드시 자기 자신을 내걸게 하는 것이다”(알랭, 『문학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어라』에서 재인용) 표현의 양식을 보면 굳이 끝을 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담아내고 있는 사상의 전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진정한 내용물을 담고 있는 글이라면 그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 비슷한 (어투나 어조의) 말을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서(해석)는 언제나 독자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책 속의 인물들은 항상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독서는 늘 새로운 세계와의 대면입니다. 늘 새로운 싸움입니다. 늘 읽는 자에게 새로운 ‘싸움의 기술’을 요구합니다. 『공자전(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어라)』(시라카와 시즈카)이라는 책도 그런 ‘싸움의 기술’로 유명한 책입니다. 한 때, 김용옥 선생이 TV에서 『논어』를 강의할 때 많이 참조했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시각을 많이 도입했던 책이지만, 그 책을 읽는 데에도 역시 새로운 ‘싸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고 그늘이 깊다. 한순간의 문답에도 그 사람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공야장」편에 공자와 안연, 자로의 대화가 실려 있다. 아마도 스승과 제자 간에 편안히 앉아서 인간관계 등과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평소의 포부가 무엇인가?”라고 말을 건넨다. 자로가 먼저 대답했다.
“바라건대 수레와 말, 가벼운 갖옷을 벗들과 함께 쓰다가 해져도 아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짐작컨대 자로는 소중히 여기던 수레와 말, 가벼운 갖옷을 친구에게 빌려 주고 속을 썩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라는 것은 아쉽다고 얼굴에 써놓은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솔직한 자로가 공자 앞에서 매우 조심하면서 한 말일 것이다. 다음에 안연이 대답했다.

“바라건대 선(善)을 자랑하지 않으며, 공로를 강요하지 않으려 합니다.”
선을 자랑하지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선의를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선의가 아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안연이 생각하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철학적 사색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번에는 자로가 “선생님의 포부는 무엇입니까?” 하고 스승의 답변을 재촉한다. 공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늙은이를 편하게 해드리고, 벗들을 미덥게 대하고, 젊은이를 사랑으로 품어주고 싶다.”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데 이 이상이 있을까. 그것은 확신에 가득 찬 인간만이 지닌 부드러움이다. 그런 스승 아래 있는 것, 이런 제자와 함께 있는 것, 이렇듯 부럽기 짝이 없는 사제 간의 정경이 겨우 60자 남짓의 행간에 흘러넘치는 듯하다. [시라카와 시즈카(장원철 역),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어라(孔子傳)』 중에서]

[논어(論語)] <출처: 문경새재박물관>
저자는 텍스트의 표현 양식과 그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요점만 확실하게 지목하는 일종의 ‘하드보일드’ 문체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특히 공자의 마지막 언사(言辭)에 대해서는 ‘확신에 가득 찬 인간만이 지닌 부드러움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저도 저자의 ‘읽기’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논어>라는 책이 일종의 교과서로 편찬된, 유교적 이념의 전파라는 ‘의도된 맥락’을 지닌 텍스트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시라카와(白川) 선생의 그와 같은 감탄은 다소 미흡한 ‘읽기’의 한 전형이 되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싸움꾼이 ‘싸움의 기술’을 좀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대목은 ‘공동체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유교적 이념의 지배를 받는 이념적, 실천적 공동체이지요. 자로나 안연이나 공자나 모두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중적(多重的) 진술을 통해서 한 가지 주제를 공고히 하는, 미하일 바흐찐 식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다성적(多聲的) 표현 양식을 지닌 부분이라는 겁니다. 앞 장에서 말한 ‘절실함’의 문제가 화자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라는 거지요. 각 화자에게 절실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자로는 사(士)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 요구되는 소유와 분배의 이념에 대해서 말합니다. 말과 수레, 갖옷(짐승의 털가죽으로 안을 댄 옷)은 당시 사(士) 계급의 자기 동일성(정체성) 유지에 가장 요긴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농사꾼이나 장사치, 혹은 가난한 서민들의 표징(운행수단이나 복장)이 아닙니다. 안연의 아버지가 아들이 죽었을 때 공자에게 찾아와 ‘(스승의) 수레를 팔아서 장례비에 좀 보태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하지만 공자는 거절합니다. 당시 대부(大夫) 계급은 수레 없이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들어서 ‘예에 어긋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그것이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당시는 ‘말과 수레(와 갖옷)’가 지금의 그것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을 친구(朋)들과 공유하겠다는 것이 자로의 대답입니다. 실무적, 실천적 지식 계급(무사계급)의 ‘집단의 윤리’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로가 생각하기에는 분배의 정의, 혹은 물질적 공유(경제 민주화?)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안연이 말한 것은 그 다음 중요한 것, 사(士) 계급의 ‘개인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분배의 정의, 물질적인 공유도 중요하지만 사인(士人)들의 공동체는 인격적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선의의 ‘타자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사람이 먼저다?). 역시 사(士) 계급에서 가장 긴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지식 공동체, 이념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자 학단에서 선과 공을 둘러싼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선함을 자랑하고 공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나제나 사(士) 계급에서입니다. 자로의 말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 역시 농사꾼이나 장사치들, 가난한 서민들이 중히 여기는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안연이 사인들끼리의 수평적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면 공자는 타 계급과의 수직적 관계를 포함한 보편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사인(士人)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위로 공경과 자애로 대하며, 옆으로는 신의로 행하는 것이 모범적 삶을 살아야 할 사(士) 계급에게 필히 요구되는 예외 없는 실천 윤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공자의 말씀이 앞의 것(제자들의 답변)을 종합하거나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병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논어>가 요구하는 ‘싸움의 기술’을 고려한다면 그게 맞지 싶습니다.

<논어>의 편찬자는 <논어>의 세 주인공을 항상 이런 식으로 배열합니다. 이를테면 이들 세 사람, 공자, 안연, 자로는 주어진 캐릭터대로 연기하는 연기자와 같습니다. 스승이 있고, 잘난 제자, 못난 제자가 있어서 제 때 제 때 필요한 역할을 하고 제대로 하모니를 이룹니다. 자로가 좀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시라카와 선생한테도 박대를 받고 있군요). 저자의 의도에 따라 때론 미련하게, 때론 용감하게, 때론 정의롭게 등장하는 것이 자롭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맥락의 핵심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군요. ‘말과 수레와 갖옷’을 자로가 말했다는 것은 그가 가장, 당시의 사(士) 계급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구현했던 인물이라는 걸 드러냅니다. 누가 뭐래도 자로는 <논어>의 주인공입니다. ‘표현 양식은 항상 자기 자신을 내걸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글: 양선규/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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