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여행, 청학의 전설이 살아있는 ‘소금강 계곡’

청학동 소금강 계곡, 수많은 청류의 폭포와 소가 이어지는 곳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치유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걸 아는 우리는 때때로 아무런 생각 없이 훌쩍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잡념과 고민들을 모두 떨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가 치유 본능이 우리를 자연으로 이끄는 것이다. 비움의 여행…그릇은 비워야 새것을 담고 북은 속이 비어야 소리가 우렁차다는 말처럼 비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임을 자연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이정찬 기자/ 더 마이스

금강산의 위용과 절경이 그대로…‘청학동 소금강’
소금강 계곡이 위치해 있는 오대산(1563m)은 태백산맥 중심부에서 차령산맥이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지점 첫머리에 우뚝 솟아 있다. 신라시대 지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과 그 산세가 흡사하다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처럼 오대산은 고봉이 많고, 산세가 남성적이면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주봉인 비로봉 외에 호령봉(1531m)과 상왕봉(1491m), 두로봉(1422m), 동대산(1434m) 등의 다섯 고봉과 그 아래 수많은 사찰들이 자리해 명산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오대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소금강 지구 노인봉(1338m) 일대는 기암괴석의 바위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계곡이 많아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금강 계곡 골짜기 대부분이 형형색색의 암반과 자갈들로 이뤄진데다 골골이 놓인 암반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과 웅덩이의 조화가 절경을 이룬다.

소금강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李珥)의 「청학산기(靑鶴山記)」에서 유래한 것으로 ,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금강의 구룡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닮았고, 소금강의 만물상은 금강산의 만물상과 닮았다.

계곡을 향해 끝없이 뻗은 수천년의 아름드리 소나무와 거대한 바윗돌, 골짜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청류(淸流)가 또 다른 신비의 소(沼)를 이루며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무심한 듯 놓인 바윗돌 하나, 나무 한그루 그리고 거대한 바위를 타고 흐르는 거친 물살에 묻혀 나직이 들리는 작은 새의 지지배배 소리에 온 몸이 정화됨을 느끼는 순간이다.

전설과 전설로 이어진 소금강의 신비…‘율곡도 청학의 전설을 아쉬워했다’
소금강 계곡 초입 진고개(960m)의 이정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고개의 명칭이 ‘비만 오면 길이 질퍽하다’하여 지었다고도 하고, 고개가 ‘길다’하여 긴고개가 진고개로 두음화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오대산이 전형적인 토산(土山)인 탓에 비나 눈이 오면 길이 유난히 질퍽였을 일이다.

저 멀리 진고개과 노인봉을 잇는 능선이 마치 한복 저고리의 바래선 마냥 부드럽다. 능선을 따라 첫 목적지인 노인봉을 향하는 길엔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가 들판을 이루어 봄날 메밀밭을 연상케 한다.

‘노인봉 2.7㎞’의 이정표를 지날쯤 내리쬐는 햇살에 빛을 더한 은빛의 사스레나무(자작나무과) 군락지가 나타난다. 백두산 정상이나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다던 사스레나무의 은빛 창연한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기품 있다.

첫 목적지인 노인봉은 옛날 착한 심마니의 꿈에 희수염의 노인이 나타나 이곳에 산삼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하여 이름을 노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발 1338m 정상에서 바라본 오대산의 장대한 산자락과 위엄은 이 땅 어느 곳과도 비교가 불가하다. 노인봉을 마주한 황병산과 아득히 보이는 매봉산, 응복산의 지세마저 오대산의 위용 앞에 조아리는 듯하다.

노봉산 정상에서의 짧은 휴식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소금강 숲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다음 기점인 낙영폭포(1180m)를 향하는 급격한 경사 길에는 데크 계단이 놓여 있다. 좁고 험준한 비탈길을 데크 탐방로로 가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우거진 숲, 암반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에 무거웠던 머릿속이 시원스레 씻겨 내린다. 잊고 지냈던 자연의 소리에 매료된 난 거친 숨소리가 날 법도 하건만 그저 콧노래의 흥얼거림으로 이 순간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계곡의 청량한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탐방로를 따라 조금씩 무아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계류를 타고 크고 작은 폭포수가 이어진다. 속을 훤히 내보이는 낮은 소가 있는가 하면 검푸른 빛의 깊은 소가 나타나길 반복한다. 낙영폭포와 광폭포, 삼폭포, 백운대로 이어지는 계곡 탐방로는 형형색색의 야생화들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백운대에서 잠시 유유자적(悠悠自適) 족탁을 즐기고 그 유명한 만물상의 귀면암으로 향한다. 바위가 귀신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귀면암의 형세가 그리 와 닿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저 닮았다고 하니 그리 보고자하는 노력이 더해져야 겨우 귀면암의 뜻을 느낄 정도. 변화무쌍한 만물상의 멋쩍은 아쉬움이 소금강의 백미 구룡폭포에 대한 기대를 더하게 한다.

숲 전체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구룡폭포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난다. 아홉 개의 폭포와 소가 이어지는 구룡폭포 중 등산로에서 볼 수 있는 폭포는 가장 아래에 자리한 8폭과 9폭이다. 거대한 암반을 타고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수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주변을 삼킬 듯 드세다.

이어 신라 경덕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아미산성에서 생활하며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밥을 지어 먹였다던 너럭바위 식당암이 나타난다. 또한 식당암에는 율곡이 소금강에서 공부할 때 이 바위에서 밥을 지어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식당암이 생긴 모양에서 유래됐을 뿐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이곳에 머물던 율곡은 눈에 잡히는 암봉과 푸른 소에 촉운봉과 경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식당암이란 이름이 촌스러웠던지 비선암으로 고쳐 부르고, 산 전체를 청학산으로 명명했다.

어느새 계곡 하단부에 다다르니 소금강의 유일한 사찰인 금강사에 이른다. 복잡했던 마음과 생각들을 숲과 나무, 계곡물에 흘려보내고 잠시 마음의 호사를 누려도 좋을 일이다. 금강송이 많이 자리한 금강사 주변은 늘 소나무 향이 감싸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탐방로의 끝자락 금강송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계곡에는 산복숭아나무와 산벚나무 꽃이 만개하면 무릉도원처럼 아름답다는 무릉계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여름 몽환적 신비를 감상하진 못했으나 가히 짐작은 하고도 남음이다.

율곡은 청학(여덟 개의 날개에 다리가 하나인 상상의 새)이 산다는 학소를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뒤돌아보았다고 한다.

비움의 여행을 떠나고자 했던 내게도 소금강을 모두 보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이 다시금 자리한다.

사진: 이정찬 기자, 강릉시청